입춘, 얼음 아래서 시작되는 봄

 입춘(立春)을 이틀 앞둔 22, 숲의 공기는 여전히 차갑다. 절기상 대한의 끝자락이라 바람 끝은 매섭지만, 곶자왈 안쪽의 흙냄새는 분명 일주일 전과는 다르다. 얼었던 땅이 미세하게 헐거워지고 있다.

세계 습지의 날을 맞아 우리는 숲에 작은 항아리 하나를 놓았다. 제주의 선조들이 띠를 엮어 빗물을 모았던 그릇, ‘촘항이다. 나뭇가지를 타고 흐른 빗방울이 줄을 타고 툭, 툭 항아리 바닥으로 떨어져 모인다.

2026 세계습지의 날 행사, 촘항만들기에 참가한 주민과 관광객

과거의 사람들에게 이것은 생명을 잇는 귀한 식수였다. 흥미로운 점은, 옛사람들이 이 촘항 항아리 속에 개구리를 잡아다 넣어두기도 했다는 기록이다. 이는 물에 독이 있는지, 마셔도 안전한지를 확인하기 위한 그들만의 생물학적 지표였다. 개구리가 살 수 없는 물은 사람도 마실 수 없다는 것을 그들은 경험으로 알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의 숲에서 이 오래된 지혜는 습지의 본질을 꿰뚫는 은유가 된다. 습지는 자연이 빚어놓은 거대한 촘항이며, 그 물이 안전하고 건강한지를 증명하는 것 역시 개구리들이기 때문이다.

이 거대한 물그릇이 채워지기를 가장 간절히 기다리는 이들, 바로 발밑 낙엽 더미 아래 웅크리고 있는 북방산개구리와 제주도롱뇽이다.

하지만 아직, 입춘이란 말이 무색하게 내겐 여전히 한겨울의 한기가 느껴진다. 하물며 변온동물인 양서류에게 이 추위는 생명을 위협하는 조건이 아닌가. 그럼에도 이들은 절기를 알고 먼저 몸을 일으킨다. 달력을 봐서가 아니다. 이들의 뇌하수체는 이미 빛의 시간을 감지했기 때문이다.

동지(冬至)가 지나고 낮의 길이가 아주 조금씩 길어지기 시작하면, 땅속에 있는 양서류의 내분비계는 미세한 광주기(Photoperiod)의 변화를 감지한다. 이 빛의 신호가 성호르몬 분비를 촉진하고, 동면 상태의 대사를 깨운다. 기온은 여전히 영하에 가깝지만 이들의 몸은 이미 봄을 향해 세팅되는 것이다. 여기에 가 방아쇠를 당겨야 한다. 차가운 빗물이 스며들어 건조했던 피부를 적시면 그것이 곧 이동 신호가 된다.

하지만 올해는 이 기다림이 유독 고통스럽다. 유례없는 겨울 가뭄 탓이다.

예년 같으면 겨울비나 눈 녹은 물로 찰랑거려야 할 숲속의 웅덩이들이 바닥을 드러낸 채 말라가고 있다. 숲의 촘항이 텅 비어버린 것이다. 몸은 이미 봄을 감지하고 깨어났지만, 정작 알을 낳을 물이 없다. 산란터을 찾아 내려온 녀석들이 메마른 흙바닥 위에서 방향을 잃거나, 간신히 고여 있는 작은 물웅덩이에 위태롭게 알을 낳고 있다. 그마저도 비가 오지 않으면 며칠 내로 말라버릴 것이다. 물이 없으면 생명은 다음 세대로 이어지지 못한다. 기후의 변덕이 숲의 가장 약한 고리부터 끊어내고 있는 현장을 우리는 목격하고 있다.

제주도롱뇽(제주자연생태공원 제공) 

이토록 이른 시기, 심지어 산란한 알이 얼어버릴 수도 있는 위험을 감수하고 녀석들이 서두르는 이유는 명확하다. ‘생존 확률때문이다. 이른 봄의 숲에는 아직 뱀이나 새 같은 천적들의 활동이 뜸하다. 물고기 같은 수서 포식자가 없는, 봄에만 잠시 생겼다 사라지는 얕은 웅덩이를 선점하기 위해 이들은 추위에 맞서는 과감한 전략을 선택했다. 그런데 지금 그 전략이 가뭄이라는 재난 앞에 무력해지고 있는 것이다.

오래전, 그 처절하고도 아름다운 본능을 목격했던 밤이 기억난다.

카메라를 메고 다큐멘터리를 찍던 시절이었다. 딱 요맘때인 입춘 무렵, 북방산개구리와 도롱뇽의 산란 장면을 담기 위해 밤늦게 동백동산 입구로 들어섰다. 한 치 앞도 분간할 수 없는 칠흑 같은 어둠이었다. 헤드랜턴의 가느다란 불빛 한 줄기에 의지해 숲으로 들어갔을 때, 나는 숨을 멈췄다. 살을 에는 듯한 밤공기를 뚫고, 차가운 흙바닥 위를 엉금엉금 기어가는 제주도롱뇽들. 얼음장이 박힌 듯 차가운 물 속으로 주저 없이 뛰어드는 그 작은 몸짓에서 뿜어져 나오는 삶의 의지는, 인간의 언어로 표현하기 힘든 경이로움그 자체였다.

그렇다면 이 치열한 생명의 태동은 어디서 만날 수 있는가.

굳이 깊고 넓은 호수를 찾아 갈 필요는 없다. 제주 중산간 곳곳에 숨겨진 작은 습지, 혹은 길가에 무심코 고여 있는 웅덩이면 충분하다. 수심이 발목에도 미치지 않는 얕은 물가, 물의 흐름이 거의 없는 정적인 공간이 그들의 산란처다.

제주도도롱뇽의 알(제주자연생태공원 제공)

주의 깊게 들여다보면 투명한 젤리 같이 투명하고 동글동글 한 덩어리 속에 까만 점들이 박혀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북방산개구리의 알 덩어리다. 제주도롱뇽의 알은 마치 순대나 고무 호스처럼 긴 타원형 주머니(알집)에 담겨 돌이나 나뭇가지에 붙어 있다. 화려하지 않아 무심코 지나치기 쉽지만, 자세히 보면 그 안에 수천 개의 우주가 숨 쉬고 있다.

관찰자가 지켜야 할 예의는 명확하다. '거리를 두는 것'이다.

첫째, 절대로 알이나 성체를 맨손으로 만져선 안 된다. 인간의 체온인 36.5도는 차갑고 축축한 피부를 가진 양서류에게는 타오르는 불과 같다. 잠시의 접촉만으로도 그들은 치명적인 화상을 입거나, 피부 호흡에 장애가 생길 수 있다. 눈으로만 관찰하고 사진으로만 남겨야 한다.

둘째, 비 오는 날 숲 주변 도로에서는 속도를 줄여야 한다. 산란을 위해 이동하는 양서류들은 도로를 건너야만 하는 경우가 많다. 이 시기 1100도로나 산록도로에서 발생하는 로드킬은 습지의 미래를 끊어놓는 일이다.

우리가 습지를 보전해야 하는 이유는 단순히 물을 가두기 위함이 아니다. 그 물이 곧 이들의 산란장이자, 숲의 생명력이 시작되는 산실이기 때문이다. 촘항에 물이 고이듯, 습지에 빗물이 차올라야 비로소 녀석들의 본능이 응답한다. 옛사람들이 촘항 속 개구리를 보며 물의 안전을 믿었듯, 우리도 습지의 개구리를 보며 숲의 안녕을 확인한다.

오늘 우리는 촘항을 놓으며 기록을 시작한다. 빗방울이 모여 항아리를 채우듯, 이곳에 제주의 생태와 사람, 그리고 사라져가는 것들에 대한 이야기를 차곡차곡 모으려 한다.

간절한 마음으로 비를 기다린다. 곧 숲의 어딘가에서 북방산개구리의 낮은 울음소리가 들려오기를. 그때가 진짜 봄이다.

<글쓴이 임형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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