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녹고 봄이 오는 우수


 시린 겨울의 긴 추위가 물러가고, 사납게 불던 바람 끝에 어느새 따뜻함이 불어오기 시작했습니다. 하얗던 눈은 조용히 녹아 땅으로 스며들고, 그 자리를 대신하듯 비가 보슬보슬 내립니다. 24절기의 두 번째 절기인 우수(雨水)는 눈이 비로 바뀌듯, 계절을 바꾸는 시기입니다. 입춘이 봄의 문을 여는 신호라면, 우수는 그 문을 지나 실제로 생명이 움직이기 시작하는 때입니다. 겨울에서 봄으로 넘어가는 전환점인 우수가 찾아옴으로써, 이제 정말 봄이 코앞에 와 있습니다.



 우수라는 이름에는 ‘비 우(雨)’, ‘물 수(水)’가 담겨 있습니다. 눈이 비로 바뀌고, 얼어붙었던 대지가 풀리며 물길이 열리는 순간을 뜻합니다. 예부터 농경사회에서 우수는 매우 중요한 신호였습니다. 눈이 녹아 비로 바뀌면, 논과 밭으로 스며들어 비로소 농사를 준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농부들은 밭을 정비하고 작물을 고르며, 한 해 농사의 시작을 엽니다. 눈으로 굳어 있던 땅이 부드러워지는 변화는 생명과 봄의 시작인 셈입니다.

 

제주의 곶자왈인 비자림에서도 우수로 인한 변화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평대리에 자리한 비자림은 수백 년 세월을 품은 비자나무들이 빽빽이 들어선 곶자왈 숲입니다. 이곳에서 가장 오래된 나무는 팔백 년이 넘은 비자나무로, 새천년 비자나무라는 이름이 붙었습니다. 이 새천년 비자나무를 비롯한 많은 나무들이 현무암 위로 뿌리를 내려 사시사철 푸른 그늘을 만들고, 그 아래 다양한 식물이 쉴 공간을 만들어줍니다.



 곶자왈은 사계절 내내 푸르지만, 우수 무렵에는 그 미묘한 변화가 더욱 선명해집니다. 겨울꽃인 동백과 수선화가 마지막 힘을 다해 향기를 내뿜고, 나무들은 초록빛의 새 잎을 틔울 채비를 합니다. 발밑에서도 변화는 이어집니다. 낙엽 아래에서 작은 싹들이 조심스레 얼굴을 내밀고, 이끼와 양치식물은 한층 선명한 빛을 띱니다. 아직은 완연한 봄이라 부르기엔 이르지만, 분명히 다른 공기가 흐르고 있습니다. 차가움 속에 따뜻함이, 고요함 속에 움직임이 스며 있습니다.



 곶자왈의 우수는 아주 느릿하고, 조용합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차분히 준비하는 시간이 더 길게 이어집니다. 겉으로는 큰 변화가 없어 보이지만, 땅속에서는 이미 물길이 흐르고 뿌리가 숨을 쉽니다. 겨울 동안 움츠렸던 생명은 조용히 힘을 모아 다시 세상 밖으로 나올 순간을 기다립니다.

 눈이 녹아 비가 되고, 비가 스며들어 싹을 틔우듯 우리의 시간 또한 흐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곶자왈의 숲길을 걸으며 귀 기울이면, 물이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계절이 넘어가는 숨결이 들려옵니다. 겨울과 봄 사이, 그 경계의 우수를 지나 곶자왈은 지금, 다가올 봄을 가장 먼저 맞이하기 위해 열심히 준비하고 있습니다.



 곶자왈이 다가올 봄을 위해 땅 밑에서부터 열심히 노력해서 꽃을 피우듯, 생태관광을 위해 열심히 노력해서 꽃 피우는 한 해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글쓴이 김현빈>

댓글

가장 많이 본 글